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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by 토리one 2025. 4. 11.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는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닌 ‘새로운 살아 있음’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 소설은 심시선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녀의 가족들이 그녀의 10주기를 맞아 하와이로 떠나는 여정을 따라 펼쳐진다. 죽은 이를 추억하기 위해 떠나는 이 여행 속에서, 독자는 단순한 가족 소설을 넘어 한 시대를 살아간 여성의 삶과 그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

심시선은 흔한 어머니상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철학, 예술과 행동으로 시대를 관통한 여성이다. 당시에는 이해받기 어려운 선택들을 했고, 종종 외면과 비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인의 시선에 길들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싸우고, 사랑하고, 살아갔다. 그런 그녀를 기억하는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의 시선이 겹쳐지며, 하나의 입체적인 인간으로 심시선이라는 인물이 다시 태어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기억’이란 결국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이었다. 누구나 언젠가 떠나지만, 남겨진 이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그 삶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심시선은 가족들에게 분명히 복잡하고 때로는 불편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진실된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찬란한 이름이 된다. 책을 덮고 나면, 독자에게도 그녀는 더 이상 단지 소설 속 인물이 아니다. 어느새 오래된 친구처럼 마음 한편에 자리 잡는다.

정세랑 작가 특유의 경쾌하고 섬세한 문장은 이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그러나 진지하게 이끌어간다. 심시선이라는 이름 속에는 한 여성의 삶만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존재가 겪어야 했던 역사, 억압, 연대, 그리고 희망이 함께 담겨 있다. 작가는 그것을 과하지 않게, 오히려 담백한 유머와 따뜻한 시선으로 전한다. 그래서 독자는 울컥하는 순간에도 웃게 되고, 웃다가도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 책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내 가족을, 나를 사랑한 이들을 얼마나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또, 나라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심시선의 삶은 완벽하지 않지만, 진실했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시선으로부터,』는 그런 삶을 사랑하고, 기억하고, 계속 살아내는 이야기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이유는, 심시선이라는 이름이 단지 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